
예전에 봤던 영화인데 언제 봤는지 생각은 잘 안남.. 중간 중간 기억나는 장면은 있었는데 메인 플롯은 생소했던걸로 보아 처음 봤을 때는 중간에 졸았던가…
난 미국 역사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러워서 싫어하는 것보다 그냥 취향이 아니다. 우울한데, 내가 좋아하는 쪽의 우울함이라기 보다는 그냥 끝에 다다른 상태의 우울함이다. 답이 없는 슬픔. 셋팅 자체가 세상의 마지막 이라는 느낌이 강해 미국 초창기 문학작품도 그다지 취향은 아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유럽이랑은 다르게 조잡스러워서 싫어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 그래서 처음 봤을때 졸았던게 아닐까 싶은.
그런데 역시 사람은 간사하기 때문에 뭔가 연결고리가 있으면 더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일단 맨하탄을 자세히 알고 난 후에 보게 되어서 인지 자잘한 시나리오의 재미 보다는 전체적인 미국 정체성에 대해 고찰하게 해줬다. 장사꾼들이 짜고 노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되었는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보면 쉽다.
그 외의 사사로운 개개인의 감정들은 100년, 200년이 지나도 똑같다. 민중들은 그저 어리석다.
…지만 빌 커팅이 눈에 많이 밟혔다.. 이런 희대의 간지깡패역은 정말 어떤 식으로 우려먹어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일단 사사로운 설정 하나 하나가 (정육업을 한다던지, 애꾸라던지, 장신에 말라 비틀어졌다던지) 매우 돋구는 덕후양성형 -.- 캐릭터인 것 외에도 참 멋있는 악역은 어떤 것이다 라는 표본을 보여주는 듯 했다. 사실 나는 주인공도 히로인도 누구도 빌 만큼 좋지는 않았다.
한국적 정서로 봤을때, 자기가 살해한 ‘적’을 존경하다 못해 추모하는 것은 꽤 이상한 정서이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그런 짓을 잘 한다. 쉽게 죽일 수 없는 강력한 적일 수록 경외심을 갖는다. 자신을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목을 딴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것 뿐이 아니라 트로피를 따는 것과도 같은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뜻이 깊다. 커팅에게는 이런 정서가 골수까지 밖혀있어서 그는 전 뉴욕에서 단 한사람만을, 곧 자기가 자기 손으로 모두 앞에서 죽인 가장 큰 적을 존경한다.
빌은 이런 면에서 봤을때 단순한 양아치를 떠나서 신념이 굉장히 깊은 남자이다. 내색은 안해도 마음이 얼마나 난도질 당했는지 알 수 있다. 츤데레나 욕데레 같은 개념이 아닌 그냥 세상에 대해 아무 미련도 기대도 가지지 않은 캐릭터. 옳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그 나머지는 상관도 없다. 목숨도 마찬가지, 아닐 경우에는 칼같이 끊어버리고 괜찮을 경우에는 남겨둘 뿐이다. 정말로 잔인하지만 사실 제일 자비로운 것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스테레오타입의 미국인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인간이 아닐까 싶다. 대중매체에서는 단순히 게으르고 욕심많은 캐릭터로 포장해 놓았지만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미국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본다.. 너무 색이 짙기 때문에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미국인들 자체가 자랑스러워하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런 더러운 것이고, 너희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엿이나 먹으렴.. 이라는 마음으로 여태껏 지탱해 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